시간을 채우는 것: 사물, 몸, 말
김해주
조각과 설치가 시간을 담는 방식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조각 또는 설치 그 자체는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키네틱 조각처럼 직접 물리적인 움직임을 만들지 않더라도, 조각의 주변으로 움직임이 발생하거나 그 자체가 수행적 기호로 작동하면서 부동의 조각, 설치를 사건적 상태로 느낄 때가 있다. 조각이 이야기를 담고 있거나 변화하는 기호를 투영하는 상태가 될 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몸짓과 말을 통해 사건이 발생할 때, 조각의 정지는 시간 안으로 연장된다. 퍼포먼스는 시각적 작업의 상태를 시간 안으로 활성화하는 장치로 개입하곤 한다.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나 상태를 사물에 중첩시키고자 할 때에도 퍼포먼스는 기능한다. 노혜리 작가 역시 조각이나 설치를 하나의 기반으로 두고 여기에 몸짓과 말을 덧붙여 정지된 장면을 사건의 시간으로 만든다. 그 시간을 채우는 것들을 분해해보면, 크게 사물, 몸, 말로 걸러진다. 그 요소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다시 그것들이 서로 만나고 충돌하고 비껴가는 방식을 살핌으로써 작가의 작업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사물
사물은 노혜리의 작업의 출발이 되는 점이다. (작가는 ‘오브제’라는 말을 더 즐겨 쓰는 듯 하다.) 이 점들로부터 출발하여 말과 움직임의 그물이 엮인다. 사물들은 대량 생산된 재료들-합판, 각목, 튜브, 비닐- 등 구하기 쉬운 것들로부터 돌, 조개껍데기, 음식의 껍질 등 주운 것과 같이 버려진 것들, 발견한 것들을 망라한다. 이 같은 재료들은 도색 같은 큰 가공 없이 그 성질과 색깔을 유지한 채 절단과 접합 정도로 형태를 획득한다. 원재료를 어떤 형태로 만들지만 특정한 사물이나 기호를 연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이 사물들은 특정한 서사 역시 발생시키지 않는다. 말하자면 구멍이 있을 뿐 컵을 가리키지는 않는 것이다. 대체로 추상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사물들은 공간 안에 나열되거나 중첩되어 있을 때 마치 펜으로 드로잉을 한 것처럼 선과 면의 구성된 장면을 구성한다. 이 같은 추상성은 사물이 향후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자유롭게 연결될 가능성을 보장하기도 한다. 사물은 또한 대체로 사람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큰 무게를 갖거나 아슬하게 쌓여있기보다는 가벼운 움직임을 가할 수 있고 약간의 탄성을 기대할 수 있는 재질과 크기로 구성된다. 크고 작은 합판의 면들이 경첩으로 연결되어 접어서 눕히면 평면이지만, 세우면 입체가 되는 다중적 사물도 있다. 사물들은 리지아 클락의 "Bichos"처럼 잡은 사람의 손의 반응으로 형태를 자율적으로 바꿀 수 있는 약간의 동물성을 갖는다. 이것을 조작하는 것은 작가 자신으로, 관객들이 사물들을 만지도록 놔둔 것은 아니다.
몸
몸은 사물을 움직이기도 하고 동시에 주체적인 서사와 결정에 따라 사물들 사이를 이동하기도 한다. 이 몸이 움직이는 공간은 대게 한정된 영역이다. 넓은 무대를 사용하기보다는 배열된 사물들을 중심으로 두고 그 가까운 반경에서 움직인다. 노혜리의 사물들이 대체로 작은 것들의 나열인 만큼, 몸이 이동하는 영역도 비교적 좁은 공간이다. 퍼포먼스 기록 영상인 <천장만나기>(2013) 의 경우 벙커 침대의 매트리스와 천장 사이의,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을 만큼 낮은 높이의 공간을 사용했다. 천정과 몸이 닿은 상태를 유지하며 마치 무용에서의 콘택트 즉흥처럼 진행되는 이 퍼포먼스는 한 번 닿은 부위는 다시 닿지 않는 것을 움직임의 원칙으로 한 상태에서 그 약속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만큼 지속하였다. 고정된 면의 상태인 천정에 비정형인 자기 자신의 신체를 대응하고, 자신의 이동 감각에 집중하면서 만드는 작업이다. 노혜리의 퍼포먼스에서 보이는 몸의 특징은 구부리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사물을 움직이는 작가의 몸은 구부리거나 쪼그려 앉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등 접힌 몸의 장면과 함께 자주 드러난다. 이는 제약된 공간의 한계를 환경으로 두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신체의 장면을 두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고, 사물을 작동시킬 때의 특정한 자세이기도 하다. 특히 퍼포먼스 <나성>(2016-2017)에서 작가가 사물을 바라보고 움직일 때 마치 디오라마나 모형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블록으로 마을을 짓고 역할 놀이를 하며 읊조리는 어린아이처럼, 작가가 오브제들을 움직이며 과거의 이야기를 분절된 서사로 말할 때, 사물은 이야기의 서술을 돕는 도구이자 기억의 증거가 된다.
사물과 몸
나열된 사물들과 몸을 연계하는 방식을 찾아 나가는 것으로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나무, 플라스틱과 같은 딱딱한 사물의 재질에 몸의 움직임을 결합했을 때 그 사이의 연계점을 읽고 또 서로의 저항점을 찾아간다. 몸은 사물을 움직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 사물의 움직임을 연장한다. 하지만 몸의 움직임이 사물의 물리적 특성을 닮아 흉내 내기보다 작가 자신의 신체가 움직이는 고유한 리듬과 방식에서 사물과 연결점을 찾는 방식이다. 몸은 훈련된 기술적 움직임을 구사하기보다 자신의 신체가 가진 고유의 움직임의 성격을 드러낸다. 자신이 움직이는 형태와 방식을 살리는 것, 그리고 사물을 움직이는 기능적인 움직임을 더하는 것 두 가지를 교차로 사용하면서 안무를 연결한다. 신체와 사물의 관계에서 윌리엄 포사이스가 ‘안무적 사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안무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도모하는 장치로서 사물들의 설치를 말했고, 여기서 사물은 몸의 움직임을 보조하는 기능이 강조된다면, 노혜리의 퍼포먼스에서 몸과 사물은 서로 주체, 객체의 관계를 오간다.
말
몸과 공간 사이에서 접합하고 저항하는 퍼포먼스에 점차 말이 더해지면서 작업은 좀 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퍼포먼스에 속한 말들에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문장으로 완결되지 않거나, 전후 관계가 모호한 여러 단어가 하나의 장면 안에 담겨 등장, 교체된다. 대부분 독백인 말에는 대화와 설명이 오간다. 감정의 이입이 없는 말의 어조는 책을 읽는 것처럼 건조하다. 작가는 사물에서 재료의 상태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의 성질을 가공 없이 사용한다. 특히 서로 다른 언어가 갖는 다른 질감을 자주 활용하고 있다. 영어와 한국어, 일본어와 한국어를 혼합하여 서로 교차하는 언어들의 다른 질감의 충돌을 전달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의미의 드러냄과 숨김을 교차시킨다. 음악의 볼륨을 조절하듯이 좀 더 명징한 의미와 좀 더 숨기고픈 의미가 언어의 선택에서 갈라진다. 최근의 작업에서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등장했다. 아버지와 딸의 가족 관계가 등장하고 LA 같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건의 단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말을 완전히 풀어놓지는 않는다. 말끝을 삼켜버린 자리에서 사건을 둘러싸고 있을 복잡한 감정을 짐작할 뿐이다. 앞서 <나성>에 아버지와 딸이 대항구조로 등장했다면 그 후 일본의 레지선시에서 제작한 퍼포먼스 <산도시>(2017)에 등장하는 두 사람(작가와 현지의 한 거주자)은 70대와 30대, 남성과 여성, 일본인과 한국인, 관객과 작가, 은퇴 연금생활자와 비정규 노동자의 대항 구조로 등장한다. 이것도 역시 불완전한 대화의 연속이다. 마치 제의를 하듯 서로 무릎을 꿇고 마주한 그들의 움직임 사이로 사물의 형태가 부분적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말이 또 부분적으로 이야기를 맡는다.
사물과 몸과 말
“몸은 오브제를 맴돌고, 몸과 오브제가 연계된 움직임은 스크립트와 만나며 다시금 선택되고 수정된다.”
“이것 또는 저것이 아니라, 이것인 동시에 저것인 몸과 장소의 가능성”
퍼포먼스 이전, 이후의 사물
안타깝게도 나는 작가의 퍼포먼스를 직접 본 적이 없다. 이 모든 퍼포먼스에 대한 나의 말들은 화면을 통해서 본 것들에 기반한다. 구부려 앉아 있다고 표현한 화면 속 작가의 모습은 그저 앵글 안에서는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인 것일 수도 있다. 바닥에 나열된 사물들도 렌즈에서는 가까이 있지만, 실은 작가의 몸과 사물 바깥에 있는 여백의 공간이 얼마나 큰지, 그 야외의 여백이 보는 사람의 감각을 어떻게 준비시켰는지는 알 수가 없다. 퍼포먼스의 기록에서 잘린 부분, 이를테면 작가의 등장과 퇴장은 어떠했는지, 그날의 한낮은 어떤 온도였는지 그것이 퍼포먼스 속의 말들을 공기 속에 어떻게 산란시켰는지도 알 수가 없다. 이는 사물과 사건을 병행해 작업하고 퍼포먼스와 전시를 함께 하는 작가가 이 둘의 서로 다른 시간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연계된다. 퍼포먼스 전후의 사물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전시에서 남겨지는 사물은 퍼포먼스와 얼마만큼 연결되어 있으며 퍼포먼스가 끝난 후에 이 사물은 독립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가? 또는 퍼포먼스를 기억하게 하는 기호로서 여전히 말과 몸짓에 강력하게 연루되어 있는가? 지금까지 작가가 전시 중에 퍼포먼스를 실행할 경우 그 작업을 촬영하여 조각과 병치한 기록의 상태로 두는 방식을 택한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차선인지, 그렇다면 탐색 가능한 우선의 방식이 무엇일까?
새로운 작업-세세리
이번 풀랩 전시 《정글짐》에서 소개되는 작가의 새로운 작업의 제목은 <세세리>이다. 세세리는 닭의 목살을 말한다. 다양한 닭의 부위를 칭하는 여러 세분된 이름 중 하나이다. 이 작업은 <산도시>(2017)와 같이 최근 작가가 일본을 오가면서 갖게 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반영한다. ‘목-살’이라는 말이 언뜻 생경하게 던지는 서늘한 느낌처럼, 작가는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행위와 죽음을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 특히 일본과 한국의 일상에서 새삼 놀라며 발견하게 되었던 역사의 이해에 대한 차이, 그리고 일상 안에 배어있는 폭력 또는 위협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이것이 작업 안에서 아직 구체적인 서사로 얘기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산도시>에서 서로 매우 다른 두 사람을 마주 세워 본 것처럼 이번에도 서로 맞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마주 세워보기를 시도한다. 안과 밖, 조각(piece)과 전체, 평면과 입체, 개인과 역사, 삶과 죽음, 앞과 뒤 등등… 의 대항의 목록이 제시되고 이것이 사물과 설치 퍼포먼스, 영상 안에 뒤따른다. 이번 작업은 작가의 이전과는 다른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갖는다. 먼저 사물이 놓이는 장소의 배경을 뚜렷한 면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공간 안에 음향으로 항상 목소리를 배치해 두는데 이를 영상과는 분리하여 설치한다. 소리가 영상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설치의 한 요소로 포함된 상태이다. 소리의 물성이 사물이 배열된 고정된 설치의 풍경에서 어쩌면 사건성, 시간성을 부각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의 오프닝에서 작가는 퍼포먼스를 하게 된다. <세세리>의 출발점이 되었던 경험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퍼포먼스의 기록을 전시장에 남겨 두는 대신, 별도의 소리와 영상을 설치 안에 두는 방식으로 작업의 변경과 시도를 선택했다. 이로써 사물이 퍼포먼스와 결합하면서도 또한 독립적인 상태로 존립할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해 보는 것은 아닐까, 예상과 기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