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의 메리

이주요

메리가 미국 이야기를 하려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언젠가 한번 살았더랬지 미국, LA를 나성이라고 흔히 불렀던 시절에.
메리의 쪼그려 앉은 다리는 신기하게도
빈틈없이 접혀 무릎이 가슴팍에 꼭 붙는다.
메리의 앞으로 툭 튀어나온 둥근 이마와 독한 곱슬머리는
잘 매만져두어도 어쩔 수 없이 큰 머리통을 만든다.
그렇지만 메리는 공기가 지나가지 못하게 웅크려 몸을 작고 프라이빗하게 만들 수 있다.
숨겨온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제 나성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그... 대디.
메리와 대디.
16년 만에 만났다지. 메리가 29살 되는 해였다.


5월

바닥에 놓인 나무판? 게임판? 이야기판!
벌려놓은 나뭇조각과 고물을 만지작거린다.
하고 싶은 말은 또박또박 한국말로
숨기고 싶은 말은 영어로 슬쩍, 혀를 굴려 넘어간다.
메리는 두 가지 말을 다 잘한다.
나뭇조각을 손가락으로 밀며 “엘레이”
흰 찰흙을 판에 탁 놓으며 “설렁탕을, 처음 도착한 날”

I am ashamed of...
대디, 어떤 기억, 부끄러워,
큰 머리통으로 좁은 판자를 받쳐 세우고 얼굴을 바짝 붙여 가린다.
고개를 처박은 것처럼 숙이고 갑자기 말을 멈추고
울 것처럼 하다가 다시 말을 맺는다.


9월

이야기판은 테이블, 허리만큼 들어 올려졌다.
넓은 바닥에서 떠낸 것 같은 흰 석고 덩이를
두 팔로 받쳐 들고 그네처럼 흔들흔들 “마당에 눈을 굴려”
언니의 사춘기에는 웅담 소주가 창밖으로
엄마가 던진 메리의 머그잔 그 파편이 피아노 밑으로.

손가락으로, 나열된 나무 막대, 대안적 건반을 한 개씩 밀며
메리는 자유라고 말한다. 기름기 없이 꺼칠하게
자유 자유 자유라고 몇 번이나 연결해서 말한다.
소소하고 작아서 여러 개를 붙인 것 같은 메리의 자유.


12월

한겨울, 메리가 자꾸 주저앉는 긴 판자를 무릎으로 받쳐 세운다.
넘어지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자꾸 말하는 당부, 반복하는 주문

한쪽에는 잡동사니를 모아두고
여기까지 요만큼은 사실 엄마 파트라고 쑥스럽게.
메리가 엄마 얘기를 좀 해보려고 모아둔 오브제.
얼마 전 넘어져 다친 엄마.

다른 쪽에는 섬 같은, 집짓기 같은,
키가 커진 물건들 앞에 메리가 곧게 서서
소녀일 때 주변에 살았던 나성 사람들의 직업을 말한다.
아버지가 알던 양 집사님, 어머니가 알던 김 목사님.
그들의 벌이를 혹은 빚을 숫자로 부른다.
서른의 메리, 과외비 삼십.
대륙횡단의 꿈, 대디의 목표는 삼만 불.


3월

메리는 로맨스 대디는 로망스,
평생의 로맨스로망스가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춤추듯. 메리가
한 줄로 연약하게 연결해둔 나무 막대를 따라 움직인다.
그들의 불안이, 불온이 닮았다.

퍼포먼스는 매력으로 시작해, 구질하고 슬픈 사연,
물건 끄는, 치는, 흔드는 소리,
말, 길게 늘이고 빠르게 숨기고 또, 속삭인다.
만지고 다시 만져 자기 몸과 연결해둔 어리숙한 물건들로
싫은 기억, 굳이 굳이 꺼내는 창피한 말이 빛나는 끝.

메리는 또한 쿨하다.
젊고도 아름답다.
오브제와 연결된 몸에, 몸과 연결된 오브제에 관심이 있다더니
사실은 퍼스널한 이야기를 해보고는 싶은데 그게 지금인지는 모른다더니
지난 1년 메리가 그걸 다 했다. 앞으로는 더 멋있게 할 것 같다.
쿨럭 쿨럭, 울렁 울렁,
이제, 메리와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