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모양: 퍼포먼스와 도큐멘테이션

1.
여덟 아니면 아홉
아홉 아니면 열이던 손
에 이끌려
(경기도 부천시 삼정동에 살던 시기이다)
모르는 길을 따라 다다른 곳에는
검은 움막
여덟 아니면 아홉인 내 눈에도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은 덩어리였다
덩어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 비닐은 군데군데 해지고 구멍이 나 있다
검은 비닐 아래엔 반투명한 비닐이었던가 천이었던가
비닐과 천을 살짝 걷어 올리고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몸에도 허리를 숙여야 했던 걸 보면
덩어리는 확실히 크지 않았다
파란 불
비닐이 뜯어진 틈새로 들어오는 빛
그 외엔 어두운 내부
달큼한 냄새
검은색 고동색 황토색 그리고 하얀 가루
파란 불을 둘러싸고
작은 몸들이 쭈그려 앉았다
벌거벗은 바닥
마르고 파삭파삭한 흙바닥은
발로 긁으면 고운 연기를 뿜었다

동그랗고 움푹한 용기에 쏟아진 알갱이들이 빙글빙글 돌고
파란 불 위에서 갈색이 되고 짙은 갈색이 되는 것을 숨죽여 보았다
하얀 가루가 툭툭 쏟아지고 옅은 갈색이 순간 부풀어 오른다
턱 하고 우리 앞에 던져 넣고 지그시 누르면 얇은 판이 되었다
얇은 판에 꾹 눌러 새겨진 모양

노릇한 갈색
달콤한 탄내
두 손바닥을 모은 것만큼 크고 동그란
김을 뿜어내는 뜨거움이
식기를 기다린다

줄곧 손에 쥐고 있어 따뜻해진
동전 다섯 개를 쭉 내밀고
조심스럽게 모양을 따라간다
작은 성공
작은 조각
둥근 모양에서 떨어져 나온 길쭉한 세모
축축한 혓바닥 가운데 놓으면
타원과 세모의 만남
부드러움과 단단함의 만남
단단함은 이내 녹고
달큼하고 씁쓸하다
목구멍을 통과하자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집중하는 손
바늘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다시 작은 성공
작은 조각
혓바닥 가운데에 쏙 넣어
순간 달큼하고 씁쓰름하고
사라진다

목구멍을 통과한 조각
알갱이에서 액체
액체에서 부풀어
다시 꺼지고
납작하게 눌려 고체
고체는 다시 액체가 되어
목구멍을 통과한다
위를 통과한다
장을 통과한다
그리고 아마 고체인 채로 나온다

2.
그러나 기억
기억에 모양이 있다면.

움막은 검은색 사실은 파란색
걸어서 한참 아니면 골목을 돌아 바로
여덟 아니면 아홉
위층 언니 아니면 옆자리 짝꿍
동전 다섯 개 아니 네 개
바깥은 여름 아니 가을

바늘을 든 작은 손들
몇은 기억조차 못 할 것
몇은 갑자기 떠올릴 것
몇은 기억하지만 같지는 않을 것

말해지고 꺼내어질 때마다 형태를 달리하는

사진 아니면 영상이 있었어도
여전히
몇은 기억조차 못 할 것
몇은 갑자기 떠올릴 것
몇은 기억하지만 같지는 않을 것

3.
스튜디오
회색의 가루
약간의 물
동그랗고 깊은 용기에 가루가 빙글빙글 돈다
고운 연기를 뿜던 가루는 점점 짙은 색
가루는 물을 흡수하고
물은 가루를 덮쳐
진득한 덩어리
약간의 물
멀겋게 뜬 물과 진득한 덩어리가 다시 빙글빙글 돌고
짙은 회색의 액체가 된다
비닐이 깔린 테이블 위
얼기설기 붙인 나무틀 안, 오목한 골 사이로
액체를 천천히 부으면
느리게 흐르는 회색의 물
골을 넘어 아래로 흐르고
나무틀에 막혀 속도를 늦춘다

멀건 물이 위로 뜨고 덩어리진 것이 가라앉아
액체가 증발하면
회색 위에 드문드문 허옇고 맨들맨들한 막이 마른다

얇게 마른 회색의 판
비닐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내다
툭 하고 반으로 갈라진다

4.
바닥에 놓인 방울들
검은색 또는 흰색
아마도 다섯 발자국
아니면 여섯 발자국 정도
하얀 종이
액자
텍스트
소리가 있다고 했덨가 아니었던가

유기적 형태
두 팔을 살짝 벌린 정도의 넓이
손바닥보다 조금 긴 책자
올컬러 아니면 흑백이었던가
플립핑북
아마도 움직일 이미지
노란색

낮은 벽
두 개의 구멍
흐르는 모양의 자국

벽에 비취는 영상
어두운

바닥에
길쭉한 네모
반사되는 검은색

곡선의 검은 튜브
유연해 보이지 않는 단단함
그리고 하얀 원
솟아오른 동그란 전등

벽에 기댄 사물들
회색 아니면 검정
어두운

흩어진 종이들

여러 개의 영상
작은 것
큰 것
벽에 비춘 것

5.
열 장 아니면 열다섯 장의 사진
좌우가 잘린 가로의 텍스트
양면인쇄 여섯 쪽
세로 텍스트 네 쪽
U.S. 레터지 백색
검은 잉크

13인치 맥북 화면
화면 밝기는 최대
스페이스 바를 눌러 미리 보기로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약 2초 길어도 3초
탁 탁 탁 탁 화살표를 눌러 넘긴다

그리고

교회
바닥이 카펫이었던가 마루였던가
의자는 전부 치워진 채
가운데를 둘러싸고
ᄃ자로 객석이 세 줄 아니면 네 줄
스륵스륵스륵 일정한 소리
두 개의 스륵스륵
가까운 것 하나
뒤쪽에 하나
빙글빙글 도는 유리 속의 유리
돔형 하얀 천장에 비취는 그림자
2층 발코니에서부터 늘어뜨려진
알루미늄 호일 파이프 하나, 두 개
중앙에서 살짝 왼쪽 뒤로는
2미터 정도의 높이, 크지 않은 넓이의 유리 상자

반투명 비닐
팔을 쭉 뻗고 힘차게 내리쳐
비닐을 편다
양팔을 휘둘러 비닐에 바람을 넣고 내리치고
바람을 넣고 내리치고
바람을 넣고 다리 사이에 끼워 넣고
총총걸음으로 움직이며 바람을 빼고
바람이 가득한 비닐을 바닥으로 내리쳐
그 위에 온몸을 기대어 바람을 빼고
쭈그려 앉은 채 비닐을 뒤집어써 온몸을 집어넣는다
발코니에선 바람 같은 어떤 악기의 소리
예민하고 가늘한 소리

이하 생략

6.
사진
몇 년 전 사진을 정리하다가
새파란 하늘
멀리엔 짙은 녹색의 숲
조금 가까이엔
색이 바랜 피크닉 테이블
그 위엔 종이컵 코카콜라 샐러드 보울
환하게 웃는 익숙한 얼굴
(까맣게 그을린 십여 년 전의 나)
그리고
어깨에 손을 두른 모르는 얼굴

누구인지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는 장면

아는 것은
곤색의 멜빵 청반바지
즐겨 입던 회색 면티
베이지색 모자뿐

7.
부분의 기억 강조 상실
한 시간
두 시간
다음날
일주일 뒤
일 년 뒤

기억의 모양은 꺼내어질 때마다 다르고
바늘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모양틀을 따라가지만
이따금 쫓아갈 모양을 잃고 허공에 맴돈다

선명해지는 순간과
희미해지는 순간

8.
반으로 갈라진
두 개의 얇은 조각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팔을 쭉 뻗어 허공에서 서로 맞추었다가
부러뜨리는 듯이 또각 손목을 꺾는다

깊게 숨을 들이쉬면
시멘트의 입자가
목구멍을 뻑뻑하게 채운다
그 입자들은
목구멍을 통과하여
위를 통과하여
장을 통과하여
무엇으로 나타날까

* 이 글은 윌리엄 포프 엘의 샌드위치 렉쳐에서 영향을 받았다.
William Pope.L, “Sandwich Lecture #8” in LIVE: Art and Performance (2004)

* 4번은 동물성루프의 전시 자료를 보고 나서 일주일 뒤 기억에 의존하여 작성하였다.

* 5번의 뒷부분은 사사모토 아키의 퍼포먼스 에 대해 쓴 것이다. 해당 퍼포먼스는 러닝타임이 약 60분 정도였고 Danspace Project at St. Mark’s Church in-the-Bowery에서 2020년 1월 16일에 관람하였다.

노혜리
2020.01.